April 21, 2025

오클라호마 시티 폭탄 테러 30주년: 과거의 반향과 현재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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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https://www.theguardian.com/us-news/2025/apr/19/timothy-mcveigh-oklahoma-bombing-far-right-1995

30년 전 이달, 오클라호마 시티의 연방 청사를 폭파한 젊은 군인 퇴역 군인과 극우 급진주의자에 대한 세계의 첫 반응은 그가 만들어 낸 참사와 그를 고무시킨 이념에 대한 보편적인 반감이었다.

26세의 티모시 맥베이가 폭탄 테러 이틀 후 FBI에 체포되면서 채찍에 묶여 외딴 오클라호마의 법원에서 끌려 나올 때, 군복 시절과 같은 크루 컷 머리에 차가운 눈빛을 한 그를 향해 군중은 “아기 살인자”라는 고함을 질렀다.

그로부터 한 시간 반 거리 남쪽, 168명이 사망하였다. 사망자 대다수는 정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던 사무원들이었고, 어린이 19명은 맥베이가 폭탄이 든 이동 트럭을 주차한 바로 그 장소 위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사망했다.

이 어린이들은 아마도 그의 주요 목표였을 것이다.

당시 대통령 빌 클린턴은 “신속하고 확실하며 엄중한” 정의를 다짐하며 국민을 결집시켰다. 그의 법무장관은 즉각 사형을 구형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총기 규제 완화를 두고 격분한 총기 권리 지지자들로부터의 극우 민병대 단체와의 관계를 한 순간에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맥베이의 동지였던 일부 극우 인물들조차도 소방관들이 잔해 속에서 죽은 아기들을 끄집어내는 현장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정부에 대한 전쟁을 상상했지만, 대부분은 법관들에게 기습을 가하거나 밤에 건물을 폭파하는 것으로 진입이 가능하리라 여겼다.

“그는 사전 조사를 하지 않았느냐?” 맥베이의 한 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놈은 애국자 운동을 30년 뒤로 보내버렸다.” 맥베이의 멘토 중 한 명도 이 같은 기분을 피력했었다.

30년이 지난 현재, 미국 내 이 운동은 단순히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치의 가장 중심부로 이동했다.

맥베이는 미국 정부를 운영하는 부패하고 비밀스러운 카발에 대해 공격하기를 원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이 현재 바쁘게 dismantling하는 ‘딥 스테이트’를 향한 예비 공격이었다.

맥베이는 미국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외국 전쟁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고 믿었으며, 백인 노동계급 미국인들이 산업 도시인 버팔로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초창기 표현으로, 지난해 11월 소수의 블루칼라 투표를 얻었다.

맥베이의 любим 책인 백인 우월주의적 권력 환상인 ‘The Turner Diaries’는 유대인과 흑인, 국제주의자들이 미국의 진정한 운명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와 같은 감정은 현재 트럼프의 이민과 다양성, 형평성 및 포괄성에 대한 전쟁에서 코딩된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맥베이는 평범한 시민들인 자신들이 무장하고 타락한 정부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기조는 미국의 건국자들이 남북전쟁 때 행했던 행동들였다. 그가 체포될 때 입은 티셔츠에는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폭군의 피로 때때로 쇠한 되어야 한다”라는 토마스 제퍼슨의 인용이 적혀 있었다.

2021년 1월 6일의 국회의사당 폭동 중 QAnon 지지 공화당 하원의원 로렌 보베르트 또한 맥베이와 유사한 생각을 드러내며 폭도들이 경찰관들을 밀치고 피를 흘리게 한 채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응원하듯 트윗했다. “오늘은 1776년이다.”

이러한 유사성은 1990년대의 정치적 베테랑들에 의해 간과되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 자신은 최근 HBO 다큐멘터리에서도 “맥베이가 사용한 단어들, 그가 한 주장들은 오늘날 주류와 같은 소리처럼 들린다. 마치 그가 이긴 것처럼!”이라고 평가했다.

극우가 미 정부에 미치는 위협은 이제 더 이상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의 행정부에 관해서는. 정리 작업에 대한 극단적으로 반발이 있는 지금, 하면도 동조하는 지도자들인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가 내부에서 이를 진행하고 있다.

맥베이가 2001년 사형 주사로 처형된 후 유사한 표현 한마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제 원조 기관을 허물고, 유능한 검사들과 정부 감시자들을 법무부에서 내쫓고, 깨진 기관인 FBI를 재구성하겠다고 vow한 행정부에 대해 반대할 가능성이 없다.

“그들의 신념과 가치는 단결되어 있다”고 당시 1995년 폭탄 테러 수사에 참여했었던 잔넷 나폴리타노는 말했다. “지금 정치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연방 청사를 폭파하고 싶어 한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가 그들에게서 도난당했다고 여기는 것도, 엘리트들에 의해 운영된다고 여기는 것도, 우리의 총기를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 속에 퍼져 있는 통념이 되었다.”

현재 및 이전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딥 스테이트’ 적으로 지정된 혐오를 받는 인물들로부터 극우의 위협에 여전히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 전체가 사이코들이라고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프라우드 보이즈와 오스 키퍼스와 같은 단체는 그들을 향해 노려보고, 트럼프는 반대 세력에 대한 “응징”의 목표로 지목하였다.

트럼프 시대의 그런 위협은 미시간 주지사 그레첸 휘트머를 납치하려는 모의 또는 당시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의 남편에 대한 해머 공격과 같은 것도 포함된다.

트럼프에 대한 동조자들은 정치적 적들과 그 가족을 향한 doxxing과 괴롭힘을 행사하며, 고발자들, 대학 캠퍼스 시위자들, 대통령의 비판자로 변한 이전의 동료들에 대해 이랫트윗을 법적으로 넘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안보 전문가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법원에서 행정부의 이익에 반대되는 판결을 내린 판사들에 대해 더욱 그러하다. “그 극단적인 오른쪽 단체들은 – 그들은 이제까지 허락을 받았다”고 나폴리타노는 말했다. “1월 6일 사건의 모든 피고인에 대한 전면적 사면은 우리나라의 법치에 대한 끔찍한 메시지를 보낸다.”

맥베이가 군에서 탈락한 1991년에는 매우 다른 세상이었다. 그는 걸프 전쟁 후 직업이 막막했으며, 무명의 일자리를 전전했으며, 수천 달러의 스포츠 도박 부채를 쌓았다. 그 후, 그는 군용 잉여정과 ‘The Turner Diaries’의 복사본을 미국 전역의 총기 박람회에서 판매하기 위해 자신의 지인인 체비 지오 스펙트럼으로 떠났다.

그는 명백히 한계 인생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맥베이는 “분노한 젊은 남자들”의 집단 중 하나로 보아지며, 이들은 냉전의 종료로 인해 제조업 및 방산의 일자리 감소로 인해 고통 받으면서 총기와 총기 문화, 그리고 망상에 가깝게 경계하는 급진 정치에 위로를 찾았다.

총기 박람회에서는 흔히 참여자들이 반정부 사상을 공유하며, ‘검은 헬리콥터들’이나 ‘군 제복을 입은 정부 폭력배들’에 관한 말들이 되어 암시를 주었다. 맥베이는 정부가 자기 뒤에 컴퓨터 칩을 삽입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운동의 가장 시끄러운 불만들은 전적으로 진짜이기도 했다. 맥베이는 연방 법 집행 기관들이 마약 전쟁 명목으로 운영하는 단속 작전에서 잘못되어 사람들을 피해본 사례를 목록으로 작성했다.

그는 1992년 10월, 한 생존자가 에센스가 모여있는 시설에서 연방 요원들에 의해 막을 내린 세미나 간섭 사건을 본 후 충격을 받았다. 당시 그는 그 생존자를 폭로한 것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을 모두 살해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며, 이에 대해 매우 비통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 그는 Waco에서 종료된 두 번째 감시작전으로 더욱 더 충격을 받는다.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종교 단체 한곳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80명 이상의 남녀와 어린이들을 숨지게 만들었다.

워싱턴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을 심각한 구조의 부패로 보지 않았고, 주로 내부 진행 후 보고서와 의회의 검토로 해결할 작업으로 여겼다. 그러나 맥베이는 Waco 사태에서 브래들리 전투차가 민간인, 그 중 어린이에게 사용된 것을 목격하고 심각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이 복수행위에 대한 폭발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했으리라.

그는 Waco에서 죽어간 어린이들을 자신의 복수의 원인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맥베이는 어린이집을 목표로 정했던 사건이 Waco에서의 어린이 죽음에 대한 복수라고 추정되는 유력 증거들이 있었다. 어린이집 운영자인 다니엘 헌트는 FBI에 당시의 증언에서, 그는 활동 중인 군인인 척 하며 그에게 어린 자녀가 있다고 두 달 이상 그 공간을 여러 차례 찾아왔다는 증언을 하였다.

그녀는 그가 보안에 관해 이상한 질문들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유리창이 너무 많다”고 말한 점을 회상하고 있었다.

FBI는 맥베이가 함께 군 복무를 한 동료로부터 폭탄을 사거나 조립하는 것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기타 사람에 대한 질문이나 그와의 관계도 예정되어 있었다고 확인했다.

수사관들이 처음 찍은 죽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마이클 포르티어는 공감보다는 목숨을 다하겠다고 외쳤다. “이건 Waco에 관한 것이야! 그 부모들은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어!”

“이 친구들은 정말 악당들이었다”고 그 폭탄 테러 수사에 직접 참여했던 전 FBI 요원 케네스 윌리엄스는 말했다. “그에게 주어졌던 형량은 너무 가벼웠다고 생각한다.”

맥베이가 어린이들은 폭파된 장소에 있는 어린이집을 목표로 했으며, 간섭 사건에서 목숨을 잃었던 아이들이 수 십 년 후의 Waco 사건에 대한 복수 심리였다는 진술을 뒷받침했던 것이다.

이 어린이로 인해 극우는 더 이상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는 계획을 잔류하지 않았다. 심지어 맥베이도, 그가 상징적이고 마찬가지로 행동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연방 법관들을 표적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회상의 내면 경향을 보여주었다.

맥베이의 행동에 감정 이입하는 것이 지나친 부분이 된 점으로 많은 해명이 없다.

오클라호마 외에서는, 30세 이상의 몇몇 미국인들은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트럼프 시대에는 그러한 기회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

이제 미국의 정부가 맥베이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든 사건을 찾아내기 위한 전모를 법정에서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의 필요에 따라, 검찰 측은 맥베이를 주장된 고단한 방향에서 단독으로 여긴 것에 대한 장치를 점점 낮춰 간 수탱이 되었다.